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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 세계사 캄보디아 인구 1/4 죽인 킬링필드 대학살 이야기 - 강연자 박장식 교수
    방송정보 2022. 5. 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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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거벗은 세계사 캄보디아 인구 1/4 죽인 킬링필드 대학살 자세한 이야기
    tvN < 벌거벗은 세계사 > 46회 킬링필드 대학살



    2022년 5월 10일 화요일 밤 8시 40분 < 벌거벗은 세계사 > 방송에서는

    캄보디아 인구 1/4 죽인 킬링필드 대학살편이 방영 됩니다.

     

    1979년 캄보디아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집니다.

    한 수용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고문과 학살

    1만 4천여 명의 수감자 중 생존자는 단 10여명

    그런데

    이 비극은 단 한명의 독재자로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캄보디아 전역을 살육의 땅으로 만든 이는

    동남아시아의 히틀러 폴 포트 입니다.

     

    안경 쓰면 학살, 고등학교 졸업생 학살, 예술가도 학살

    갖가지 이유로 국민들을 끔찍하게 학살하고

    모든 도시에서 전 국민을 강제로 쫓아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렇게 죽은 사람만 캄보디아 인구의 무려 4분의 1이라고 합니다

    폴포트는 대체 왜 이런 만행을 벌인 걸까요?

    어떻게 이런 독재자가 캄보디아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잊을 수 없는 광기의 역사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속 숨겨진 진실을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낱낱이 벗겨드립니다.

     

     

    킬링필드 자세한 이야기

     

    1960~7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
    좁게는 크메르 루주 정권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처형한 사건을 말하며, 넓게는 이를 전후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해골이 야지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사진들로 유명하다. 이 사건은 나치와 함께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 '근대의 실패', '이성의 실패'를 드러내는 사례로서도 주장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이를 틈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1945년 3월 12일에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1946년에는 다시 프랑스의 보호 하로 돌아와 독립이 무효로 돌아갔으나 끈질기게 독립 운동을 계속해 1947년에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1949년에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할 것을 선언하였다. 1953년에는 경찰권, 군사권을 회복해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시아누크는 비동맹·중립 외교 정책을 표명했다.

    1965년 5월, 시아누크는 북베트남에 폭격을 행하는 미국에 대해 수교 철회를 선언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어수선한 동남아시아였지만 시아누크 정권 시기에는 내전이 격화되지 않았고, 식량이 풍부하여 수입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으며, 대량의 난민도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어느정도 벗어난 중립외교를 표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직후 동부 캄보디아 지역은 사실상 북베트남의 실효 지배 하에 있었으며 대규모 지하 터널 네트워크를 통한 보급(호치민 루트)을 확보하고 있었다. 미군에 의해 '성역'으로 지칭되던 이 지역에 타격을 주기 위해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한 '비밀 작전'을 추진하게 된다.

     

     


    1969년 3월, 미 공군이  아침 식사 작전(Operation Menu)이라 불리는, 동부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하였으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북베트남 남부전선 사령부(COSVN, 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에 타격을 주긴 했으나 호치민 루트를 절단하지는 못했다. 이후 남부전선 사령부가 계속해서 이동하며 게릴라전을 벌이자 미국은 폭격 지역을 확대했지만 마찬가지로 큰 소득을 얻진 못했다. 남베트남과 미국의 연합군의 작전인 '슈메이커 작전'도 무익하게 끝났다.

    그리고 1970년 3월에 일부 군부 세력이 미국과 결탁해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립정책을 펴던 시아누크 국왕은 당연히 축출되었고, 론 놀이 집권하게 됐다. 이후 미국의 공습이 더욱 격화되어 캄보디아의 농지가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다. 농지의 황폐화로 인해 기반 산업인 농업이 무너지자 경제가 붕괴되었고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 폭격과 그에 따른 각종 식량난, 재해로 인한 사망이 12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폭격의 1차적 희생자만 캄보디아에서 60만 명, 라오스에서 35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키신저 재판》참조. 이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들었고 식량난과 국제적 고립에 처한 캄보디아는 실향민 및 난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며 역설적으로 미국에게 식량 지원을 받는 등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할 시간만을 벌어주는 역할만 했을 뿐, 오히려 내전의 확대를 부추기고 말았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캄보디아나 남베트남 군이 메울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공백을 남겼다. 결국 이 공백을 엿보던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베트남전 시기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행한 대규모 폭격의 성과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으나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본다. 월맹군의 보급도 차단하지 못했던 비효율적 폭격으로 식량난과 재해가 발생했다는 건 말 그대로 언어도단이라 보는 입장도 있으나, 그 폭격 자체가 상상 이상으로 비효율적이었다. 폭격할 베트콩 운송 트럭을 발견하지 못하자 결혼식장을 대신 폭격하고 돌아갔을 정도다. 게다가 애초에 호치민 루트가 대규모 땅굴망을 기반으로 한지라 폭격으로 차단할 수 있는 성격의 보급로가 아니었다.

     

     



    1960년에 설립된 좌익무장세력이었던 크메르 루주는 론 놀 정권의 친미 정책과 미국의 본토 폭격을 비판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의 실현과 론 놀 정부의 친미 노선 철폐라는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농민, 공장 노동자, 민족주의 세력이 모인 거대한 정치 공동체였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 곧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서서히 민심을 잃고 있던 론 놀 정권은 1973년 3월 29일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함에 따라 치명타를 입었고 정치적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1975년 4월 17일에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미 전국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크메르 루즈는 자연스럽게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고 복귀를 위해 크메르 루즈를 지지하며 물밑 작업을 펼쳤던 시아누크 국왕이 다시 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벌것벗은 세계사 킬링필드 강연자

     

    박장식 교수님

    現) 동아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 

    現) 아세안연구소 소장

    現) 대통령 직속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회 위원

    現) 문체관광부 국제문화교류진흥회 위원

    前) 한국동남아학회 12대 회장

    한국외대 인도어문학 학석사

    오사카외대 동남아문화 문학석사

    인도 바나라스힌두대학 언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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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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